본문 바로가기
여행/수도권

통합관람권 한 장으로 돌아보는 수원여행

by 아재. 2017. 1. 12.

전 이야기가 있는 도시를 좋아합니다. 경기도에서 이야기가 가득한 곳은 수원이란 도시가 있죠. 정조대왕은 수도를 한양에서 수원으로 옮기려고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더라도 대단히 파격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당시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가깝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사실은 변질된 붕당 노론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친위세력을 육성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겁니다. 조선은 땅을 기반으로 세력이 번성했기 때문에 수도를 옮기면 토지기반을 잃은 노론들의 힘이 빠질 것이 자명했으니까요.

그렇게 정조는 원대한 꿈을 안고 수원을 둘러싸는 수원화성을 쌓고 화성행궁도 손을 보았지만, 49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죽고 맙니다. 지금 우리에게 수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그 속에는 조선후기의 황금기 한켠을 보여주는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수원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박물관, 화성행궁, 그리고 수원화성을 돌아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네 곳은 기특하게도 통합관람권 한 장이면 모두 돌아볼 수 있어요. 가격은 성인 3,500원입니다.






1. 수원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수원박물관'



수원박물관은 수원에서 용인으로 넘어가는 영통구 이의동 국도변에 있습니다. 기획전시나 특별전시는 자주 바뀌지만 수원역사에 관한 건 언제나 볼 수 있답니다.







이 오래된 사진 한장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근대 우편제도와 갑신정변의 시작은 우정총국이 만들어지면서 부터입니다. 우정총국의 초대 책임자는 홍영식이이었는데, 그는 갑신정변의 주인공이자 고종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다 죽은 사람입니다. 영의정이었던 그의 아버지 홍순목은 아들의 반역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형 홍만식은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다 자결해 버렸습니다. 이들 삼부자는 추구하는 이상은 서로 달랐지만 비극적인 혼돈의 시대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여긴 수원의 옛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네요. 저 멀리 '화춘옥'은 수원갈비의 원조였어요.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박정희 대통령이 드시고 갔다해서 유명해 졌습니다.







다른 전시실은 한국에서 최초로 만든 한국서예박물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서예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조선 왕들의 어필을 포함해 한석봉, 김정희 등 조선 명필가의 친필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흘려 쓴 것 같은 오른쪽 글은 영조가 쓴 글입니다.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에서 돌아오다 폭설을 만나 하룻밤 쉬며 쓴 시인데, '朝來心有喜, 尺雪驗豊徵' 조래심유희, 척설험풍징. 아침이 오니 즐겁기 그지없고, 눈이 많이 내렸으니 틀림없이 올해도 풍년이 들겠구나.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진 가장 왼쪽의 송죽(松竹)이란 글귀는 영조가 일곱 살 때 적었던 글씨입니다. 뒷면에 흥선대원군이 정조가 쓴 것을 봤다는 정품인증 도장(?)도 찍혀 있습니다. 재미나네요.







이 편지도 재미납니다. 암행어사는 원래 출발하기 직전에 봉서를 열어 그 목적지를 알 수 있었는데, 이 봉서에는 원래 지역인 웅천(진해), 그 다음엔 기장으로 고쳤다가 O표시로 또 지우고, 마지막으로 '고성'으로 고쳤습니다. 영조가 암행어사 김종정에게 내린 봉서인데, 출발 전에 자꾸 미리 읽어 이렇게 고쳤다고 하네요. 수령이 흉년, 재난으로 힘든 백성을 잘 보살피고 있나 알아보라는 내용입니다.






2. 수원화성에 얽힌 이야기 '수원화성박물관'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의 축성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필히 와야할 곳입니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조선은 농업국가라 정조와 신하들은 농업에 관한 연구가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농서를 수집하는 사업도 했었죠. 위의 길다란 문서는 수원화성을 한창 짓고 있던 1794년에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는데, 정조는 성 짓는 걸 그만두고 모두 화성 북쪽의 빈땅에 농사를 짓고, 수리시설을 지을 것을 명령했던 문서입니다. 친절하게 한글로 번역까지 해놔서 알아보기 슆네요.







화성성역의궤. 많이 들어 보셨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는데, 수원화성 축성의 시작과 끝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둔 책입니다. 얼마나 상세히 되어 있냐면, 1794년 착공부터 1796년 완공까지 성 세부 도면, 투입된 인부의 수와 그들의 인건비, 투입 자재의 숫자와 가격, 후대에 가격 비교를 위해 당시 물가, 감독자는 누구였고 장인은 또 누구였는지, 이런 업무를 처리하면서 왕과 주고 받은 서류까지 아주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채제공 초상 일괄-시복본(蔡濟恭 肖像 一括-時服本) 보물 제1477-1호.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전시물은 채제공의 초상화입니다. 돌아가신 오주석 교수님의 '한국의 美 특강'이란 책에서 극찬을 했던 초상화죠. 채제공은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했던 핵심인물인데요.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 관복을 입고, 향낭이 달린 부채를 양손으로 잡고 화문석에 앉아 있습니다.


조선의 초상화는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게 특징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수염 털 한올한올까지 정직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의 검버섯에다 심지어 눈이 사시인 모습까지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조선의 초상화에는 손을 그리지 않는데, 이건 정조가 내린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려 넣었습니다. 가끔 특별전시 할 때, 저 부채와 향낭을 내릴 때 정조가 썼던 편지도 공개할 때가 있습니다.






장용영 편액 탁본. 문무가 균형 발전해야 나라가 부국해진다고 믿는 정조는 문무 균형발전을 위해 규장각과 장용영을 함께 만듭니다. 이 시대를 황금기라고 칭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두 기관이 균형 발전했기 때문인데요. 정조가 죽자마자 왕의 친위대인 장용영이 헤체되어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3. 이곳으로 돌아오려 했던 정조의 '화성행궁'



정조는 천도가 완료되면 아마 화성행궁에서 머물려 했을 겁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가려고 일년에 한 번 이상 다녀갔는데, 행궁은 왕이 지방에 갈 때 잠시 머무는 임시 궁궐을 말합니다. 여긴 화성행궁의 입구인 신풍루.







신풍루 앞에서는 화~일요일 오전 11시에 무예24기 공연이 열립니다. 이 공연은 정조의 명을 받은 실학자 박제가와 이덕무, 그리고 무예 고수인 백동수가 중국, 일본의 무예에서 우수한 것만 뽑아 만든 '무예도보통지'를 기반으로, 장용영 군사들이 갈고 닦던 24가지 무술을 재현한 겁니다. 진검 공연도 있고 현장감이 대단한 공연입니다.







팔달산 아래에 다소곳이 있는 이 건물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렸던 '봉수당'입니다. 봉수(奉壽)란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라는 뜻으로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비는 아들의 마음이 담겼습니다.







이곳은 행궁 우측에 있는 화령전의 '운한각'입니다. 이곳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있습니다. '운한'은 은하수를 말하는데, 정조의 혼백이 나라의 어려움을 보살펴 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6.25떄 불타서 현판을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썼다고 하네요.







그리고 따뜻한 봄이 오면 행궁 안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많은 체험거리가 있어요. 한지공예, 떡만들기, 탁본, 부채만들기, 도자기 빚기 등등 재미난 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4. 이루지 못한 정조의 꿈이 서린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총 연장 5.7km의 제법 큰 성곽입니다. 이곳은 걸어서 돌아봐도 크게 무리가 없지만 몸이 불편하다면 화성어차를 타고 돌아봐도 좋아요. 화성어차는 빨간색 선을 따라 수원화성을 거의 전체를 한바퀴 돌아 줍니다. 정조의 꿈은 49세의 나이에 저세상 가시는 바람에 무산되었지만, 수원화성은 개혁적인 계몽군주가 지향했던 왕권강화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성어차 탑승장이 있는 동장대(연무대)에는 국궁체험장이 있어요. 저 멀리 곰을 맞추는 체험인데, 원래 곰 얼굴은 왕만이 사용하던 과녁이었죠. 저도 여러번 체험 해봤는데, 이게 힘들지도 않고 참 재미납니다.







길을 돌아다니는 화성어차는 요래 생겼습니다. 편도로 이용해도 되고 왕복해도 되고, 비용도 저렴해서 부담이 없어요. 깔끔한 걸로 봐선 최근 차량을 모두 새걸로 교체한 모양이네요.







이 문은 수원화성의 정문이자 북문인 장안문입니다. 이 문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보다 규모가 더 크고, 우리나라 성곽 문 중에서는 가장 큽니다. 장안문은 한양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임금은 이 문을 통해 수원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장안'이란 말은 도읍을 의미하죠. 정조가 이곳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건 문의 이름 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벽을 바깥에서 바라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원형이 거의 완벽히 보존되어 있어요. 수원을 가로지르는 수원천 물도 아직까지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옛길은 지금도 수원의 주요 도로망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수원화성은 야경으로도 멋진 곳이죠. 사진 재주가 없어 이 정도 밖에 못 보여 드리지만,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일대는 사진가들에게 인기있는 포인트입니다. 화홍문에는 여름이면 물보라가 일어 무지개가 피는데 정말 장관입니다. 화홍문의 '홍(虹)"자가 무지개를 뜻합니다.


정조는 화성축조를 하면서 강제징용을 하자던 대신들의 요청과 반대로 백성들에게 임금과 의료혜택을 주며 공사를 했습니다. 그 덕분에 10년이 걸릴 것이라던 애초의 계획은 전국에서 몰려온 백성들로 2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성곽으로 완성 됩니다. 수원화성은 그 의미로 보나 아름다움으로 보나 세계 최고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댓글